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믿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바벨사건 이후에 셈의 족보가 나온다. 노아는 셈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족속이 될 것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민족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셈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복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축복을 받은 셈의 후손은 오히려 저주를 받은 듯한 함의 후손들에게 영적인 지배를 당해버렸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해야 할 민족이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지배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바벨은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앙에서 남쪽으로 밀려났던 함의 후손들은 힘이 키우고 강성해져서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장악하여 자신들의 뜻에 맞는 큰 도시를 세우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심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들의 영향은 유지되고 있었다. 세상은 이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만든 새로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셈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해 전해야 할 사람들인데 이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자손인 데라의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지역의 신을 섬기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된다.
1. 데라의 믿음
하나님은 데라의 가족에게 세상의 중심인 우르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데라와 그의 아들인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믿음의 여정의 시작이다. 이 과정이 간단하지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데라와 아브람의 신앙 선생님은 놀랍게도 노아의 아들인 ‘셈’이다. 그런데도 데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신을 섬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문화가 아니라 세상에서 추구하고 유행하고 유익하다고 제시하는 방향을 따르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 데라가 우르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는가? 절대 듣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정말 안들린다. 따르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데라도 그랬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계기가 생긴다. 바로 아들 하란의 죽음과 며느리의 불임이다.
자식이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저주이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신의 뜻을 찾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신이 나에게 노한 것인지? 아들에 죽음에 이은 며느리의 불임은 그 가문이 자신 때문에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데라는 어떤 결단이든 내려야만 했다. 그래서 누구를 통해 들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르를 떠나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의 생명 같은 고향과 친척들을 떠나 가나안이라는 저 먼 지방으로 이주를 결정한다.
그러나 메소포다미아 끝부분에 하란이라는 지역에서 강을 건너면 이제 새로운 땅으로 가는 여정인데 거기서 더 이상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다가 결국 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 데라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지금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거나 심지어 절이나 무당집을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무당을 찾아가서 점을 보거나 시대에 문화와 사상에 따라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큰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거나 목사님을 찾아옵니다. 누가 죽었다든지 큰 병에 걸린다든지 사업이 잘못되든지 직장에 무슨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 뜻대로 되면 하나님을 또 잊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데라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고 죽은 믿음이라고 해서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동행할 수 없고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의 영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아브람의 믿음
이와 대조되는 데라의 아들 아브람의 믿음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이는 믿음의 시작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노아의 시대 이후에 모두가 믿음을 잃어버린 것 같았던 꺼져가는 불씨같던 믿음이 어떻게 아브람을 통해 타오르게 되었는지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데라와 같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무엇으로 먹고 살게 해주실 것인지? 이런 언질은 하나도 없습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은 홀몸도 아니고 막막하겠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가족 전체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지금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상황도 아니고 잘먹고 잘살고 있는데 식인종이나 인신제사를 드리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러 가라는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왜 데라가 가다가 멈췄겠습니까? 아들이 죽고 며느리도 불임이니까 그것을 해야겠다고 이동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동을 하다보니 정신이 차려지고 현실적인 생각이 딱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먹고 살만한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어떻게 가나안으로 계속 향할 수 있었는가?
행7: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람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람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떠나라면 떠나고 가라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말만 번지르하고 꿈쩍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들었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여기있습니다. 창세기 본문으로 돌아와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은 데라와 아브람이 똑같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하란까지 갔다가 거기서 죽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가나안까지 갔습니다. 하란까지는 함께 가는 여정이었지만 이후에는 아브람이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데라가 죽고 나서 하란을 떠났을까요? 데라가 죽기 전에 아브람이 떠났을까요? 정답은 둘 다 맞습니다.
성경으로 확인해봅니다.
11: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만약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이 떠났다면 그의 나이는 약 135세 쯤이어야 한다.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런데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브람이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둘 다 맞는 말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또 다른 성경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이런 성경의 말씀들을 알지 못하고 설교만 듣던 분들이 아브람이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가나안으로 갈 수 있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이단들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계산하며 설명해주며 목사님들이 다 틀리고 성경을 모른다고 말하면 훅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 말씀은 스데반 집사가 대중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설교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래서 그 시작이 하란에 있기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라고 시작하지만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점은 하란 땅에서이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떠나지만 스데반 집사는 아버지가 죽고 그들을 옮기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해보자.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걸어갔을까? 하나님이 들어서 옮겨놓으셨을까? 이것은 영적인 화법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신 것도 티비나 스크린을 보듯이 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현상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영적인 죽음, 즉 믿음과 신앙에서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알지 전 그리고 만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데라와 같이 영혼이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가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을 인지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했는데 창세기 본문에 하란에 있을 때는 한 가지가 추가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우르에 있을 때는 비옥한 고향 땅 그리고 든든한 친척들과 가문의 이름을 모두 버리고 떠나라고 하였고, 하란에서는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했다.
4. 결론
데라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회심할 기회가 있었다. 아들이 죽었을 때 그리고 며느리가 임신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아들 아브람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그에게 함께 가나안에 가자고 했을 때가 바로 기회였다. 그러나 데라는 자기 삶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떠나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거기거 그렇게 죽은 것이다.
우리도 지금이 결정적인 기회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같이 예배하고 말씀도 배우고 기도하며 삶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라. 그래서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대로 떠날것이 있으면 떠나고, 가야 할 곳이 있으면 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하지말고, 할 것이 있으면 해야한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은 이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거의 다 한번 이상은 들어봤을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었고 안다고해서 그 사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믿고만 있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찾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거나 무엇을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시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데라와 같이 이렇게 예배에 나오는 것으로 그쳐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과 같이 똑같이 살아가다가 죽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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