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끄러운 행위를 폭로하는 것을 금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의 인류의 조상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고 예배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존경의 대상이며 이정표이고 푯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지도자의 자리는 고독하고 외로우며 많은 고뇌를 감당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심판 이후의 노아가 받았을 충격과 갈등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어려움과 혼란 중에 노아는 포도주를 과음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술을 마신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취하였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친밀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 걱정하며 두려워 할 때에도 당당하며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는 노아도 인간적인 연약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오늘 본문에 노아의 잘못과 함의 잘못이 동시에 나오는데 노아의 잘못은 언급하지 않고 함의 잘못만 부각이 되어 치명적인 저주를 받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술취하여 쓰러져 있는 노아가 더 큰 잘못을 한 것 같고, 함은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했을 뿐인데 너무 가혹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을 폭로하는 행동을 금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1. 남의 잘못을 드러내는 자
만약에 함이 평생에 딱 한번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데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대대로 ‘종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면 너무나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내용을 기록할 때에는 이미 누적된 잘못들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사건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마치 가인이 인생에 딱 한번 제사를 잘못드린 것이 아니라 그 행동으로 인하여 그동안 그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듯이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의 행동이 이전부터 바르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함의 행동과 극명하게 다른 형제들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선과 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듯이 보입니다. 노아의 실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대명사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렇게 기록되었듯이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고 태어날 때부터 악함을 안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노아 또한 인간이었기에 그의 약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노아와 같이 실수하는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의 실수는 세상의 이슈가 되기 쉽습니다. 그만큼 경건하고 정의로워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실수한 목사에게 자비가 없습니다. 여기서 노아의 실수는 우리가 아는 목사들 중에 위대한 목사님의 실수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술취해서 나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함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를 궁금해 하기도 하며 그것을 말하고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본성에 이끌려 잘못을 한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에 대하여 노아를 통해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는 저주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으로 인해 그런 저주를 받았다고 볼수도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불러온 저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함의 자손인 가나안은 이후에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이 되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가장 하나님께 대적하는 문화를 가지고 우상을 숭배하며 성적으로 문란하게 생활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진멸 당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2. 남의 잘못을 덮어주는 자
이렇게 본성에 이끌려 남의 수치를 드러내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남의 수치를 덮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셈과 야벳입니다. 함이 형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셈과 야벳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본성이 이끌리어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는 22절과 23절이 바로 이어져서 함이 두 형제에게 알리자 마자 그들이 곧장 옷을 가져다가 아버지께로 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절 사이에는 기도의 시간이 있었을 수 있고, 묵상의 시간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숙고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바로 이런 행동을 했다면 이들이 이미 이런 삶으로 매우 훈련되어 있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저또한 이런 경험을 많이 했는데 함처럼 행동할 때도 있었고 셈과 야벳처럼 행동할 때도 있었습니다. 함처럼 행동할 때는 그 순간의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그것을 컨트롤 하지 않고 말이나 행동을 했었고, 셈과 야벳처럼 행동할 때에는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거나 상황을 직시하며 묵상하다보면 상대방의 상황과 마음이 이해가 되고 더 깊이 기도하고 생각하면 감정은 고요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드러내고 지적하기 보다는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3. 죄를 덮는 성도의 삶
노아의 잘못은 결코 무마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하지 말아야 할 잘못으로 인하여 그의 형제들이 후대까지 분쟁을 일으키는 비극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불이 난 곳을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금새 알 수 있듯이 누군가 불을 지른 것을 보고 불이 났다며 그 불에 기름이 붓고 사방으로 번지게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며 어리석은 일입니다. 누가 실수로 불을 냈다면 그 불을 끄기 위해 모래나 물로 덮어야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계명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이 먼저이고 그 이후에 우리의 잘못도 용서받기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는 늘 이러한 분쟁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 취약합니다. 마치 불이 붙을 수 있는 장작이나 지푸라기가 쌓여있는 창고처럼 교회는 약간의 잘못이나 분쟁에도 활활 타버릴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것으로 실망하고 그것을 퍼뜨리고 정죄하려하기 보다는 먼저 그것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이후에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기도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셈과 야벳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셈은 모든 영적인 일에 제사장 민족이 되었고, 야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창대한 민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본받아 셈과 야벳과 같이 남의 허물을 보지않고 덮어주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쓰시는 인생과 가정 그리고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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